미국 프로농구(NBA) 역사상 최초로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던 '전설의 빅맨' 밥 페티트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페티트의 장례예배는 10월2일 루이지애나주 메타리의 세인트마틴 성공회교회에서 열린다.
모교인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LSU)는 NBA의 한 시대를 연 페티트가 9월24일(현지시간) 미국 루이지애나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대학 측은 구체적인 사인(死因)은 밝히지 않았다. 1932년 12월12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서 태어난 페티트는 1954-1955시즌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전신인 밀워키 호크스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1964-1965시즌 은퇴할 때까지 11시즌을 오직 호크스에서만 뛴 대표적인 '원클럽맨'이었다.
현역 시절 페티트는 골밑을 지배하는 거인이었다. 1955-1956시즌 평균 25.7점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그해 제정된 NBA 최초의 정규리그 MVP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1958-1959시즌에도 평균 29.2점으로 득점왕과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올스타전 MVP 역시 네 차례나 차지했는데, 이는 훗날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만이 이룬 대기록이다.
특히 1957-1958시즌 파이널이 페티트 농구 인생의 정점이었다. 당시 미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가장 강력한 '보스턴 셀틱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호크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한 파이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보스턴이 10시즌 동안 9차례 우승을 차지하던 독주 체제에 유일하게 제동을 건 주인공이 바로 페티트였다. 파이널 무대에서 보스턴과 총 네 차례 맞붙었으나, 1957년(7차전 2차 연장 패배)과 1960년(7차전 패배), 1961년(5차전 패배)에는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N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밥 페티트. 애틀랜타 호크스 SNS
배턴루지고교(Baton Rouge High School) 1학년 때에는 주니어대표팀의 사실상 ‘벤치 워머(벤치에서 대기하는 후보 선수)’였고 2학년 때는 대표팀 선발에서 아예 탈락했다. 좌절한 그에게 다시 코트를 열어준 곳은 교회였다.
세인트제임스 성공회교회 목회자의 권유로 또래 친구들과 교회 농구리그를 만들었다. 페티트에게는 이곳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조직 농구를 경험한 무대였다. 교회리그에서 실력과 자신감을 키운 그는 이듬해 배턴루지고 농구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키도 5인치(약 13㎝)가량 자랐다. 그 후 배턴루지고를 주(州)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루이지애나주립대 시절 밥 페티트 선수의 모습. Wikimedia Commons(The Sporting News Archives)
그 뒤 소년의 농구 인생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루이지애나주립대(LSU)를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 ‘파이널 포(4강)’까지 이끈 그는 1954년 NBA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밀워키 호크스의 선택을 받았다. 마른 체격 때문에 프로에서 버티기 어렵다는 의심도 따라붙었다.
그러나 데뷔 시즌 신인왕을 차지했고 이듬해 NBA가 처음 만든 MVP 트로피의 주인공이 됐다. 1958년 챔피언결정전에서는 강호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마지막 6차전에서 50점을 몰아넣으며 호크스에 우승을 안겼다. 1959년에는 두 번째 MVP를 차지했다. 11시즌에 걸친 선수 시절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올스타에 선정됐다. 은퇴할 때 그의 이름 앞에는 ‘NBA 최초 통산 2만 득점’이라는 기록도 붙어 있었다.
농구와 함께 그가 붙든 또 하나의 축은 신앙이었다. 페티트는 미국기독선수회(FCA) 캠프에 꾸준히 참여했다. 1959년 콜로라도주 에스테스파크에서 열린 FCA 전국대회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직접 농구를 가르쳤다. 이듬해 위스콘신주 레이크제네바 FCA 캠프에서 페티트의 복음 메시지를 들은 위스콘신대 농구감독 존 에릭슨은 신앙을 받아들였고 훗날 FCA 회장이 됐다.

밥 페티트 선수가 1959년 당시 미국기독선수회(FCA) 캠프에 참여해 참가자들에게 농구를 가르치는 모습. FCA 제공
그의 목소리는 당시 대학생이던 빌 브래들리(Bill Bradley)의 삶에도 흔적을 남겼다. 워싱턴포스트(WP)가 1999년 12월 브래들리의 신앙 여정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프린스턴대 1학년이던 브래들리는 학업과 농구에서 잇따라 어려움을 겪으며 실패에 대한 불안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기숙사에서 FCA가 제작한 음반 ‘언더 더 마스터 코치(Under the Master Coach)’를 틀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농구 영웅 페티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네 뒤에 있겠다고 말해준 동료를 떠올리면 힘이 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와 같지만 훨씬 더 좋습니다.”
그 말을 들은 브래들리는 자신의 관심이 온통 ‘나’에게 쏠려 있음을 돌아봤다. 성적도, 운동도, 걱정도 모두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렸고 처음으로 예수에게 개인적으로 기도했다. 훗날 브래들리는 이 경험을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회고했다.
농구팀에서 밀려난 소년에게 교회가 내어준 작은 코트.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 소년은 NBA 최초의 MVP가 됐다. 그리고 자신이 받았던 기회처럼 자신의 농구와 이름, 신앙을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데 사용했다.
■'포워드 혁명가'…코트 밖 금융인으로 제2의 삶
키 206cm, 몸무게 93kg의 탄탄한 체격을 지녔던 페티트는 현대 농구 파워포워드 포지션 개념을 확립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골대를 등지고 몸싸움만 벌이던 당시 센터들과 달리, 골대를 마주 보고 던지는 정면 슛과 기동력을 겸비한 최초의 빅맨이었다. 11시즌 내내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올스타에 뽑혔을 만큼 철저한 자기관리도 돋보였다.
페티트는 통산 평균 26.4득점, 16.2리바운드를 남기고 1965년 코트를 떠났다. 은퇴 당시 통산 2만 880득점으로 NBA 역대 1위, 1만 2849리바운드로 역대 2위였다. 은퇴 뒤에는 고향 배턴루지로 돌아가 은행원 및 금융 컨설턴트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도 LSU(루이지애나주립대)와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농구 명예의 전당은 페티트에 관해 "포워드 포지션에 혁명을 일으킨 매끄럽고 노련한 빅맨이자 농구계의 진정한 거인"이라고 평가했다. 명예의 전당 프로필에는 "날씬하고 우아하며 늘 완벽한 몸 상태를 유지했던 페티트의 체격은 골대를 마주 보고 플레이하는 최초의 빅맨을 탄생시켰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지독한 훈련량과 투지가 그를 동료들과 구분 짓는 핵심이었다"고 적혀 있다. 페티트는 197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친정팀 애틀랜타 호크스도 성명을 냈다. 구단은 "고인이 우리 구단과 농구 역사에 남긴 공헌에 감사한다. 고인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세대의 선수와 팬들에게 영감을 주는 탁월함의 기준을 세웠다. 그의 끊임없는 근면성, 투지, 그리고 농구에 대한 헌신은 우리 구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면서 "전 세계 농구계와 함께 결코 잊혀지지 않을 그의 놀라운 삶과 유산을 기리며 추모한다"고 애도했다.
페티트의 등번호 9번은 애틀랜타 구단에서, 등번호 50번은 모교인 LSU에서 나란히 영구결번됐다. 애틀랜타는 "영구결번된 9번 유니폼은 팀에 남긴 족적을 영원히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홈구장 스테이트팜 아레나에 걸려 있을 것"이라고 했다. LSU 홈 경기장 밖에는 피트 마라비치, 샤킬 오닐과 함께 페티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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